전 세계 이스포츠 팬들이 환호할만한 새로운 축제의 장이 열렸다. 원래는 Gamers 8라는 대회로 3년 정도 열리다가 올해부터 <이스포츠 월드컵>으로 대대적인 리브랜딩을 거쳤다. 더불어 개편과 동시에 리그 오브 레전드가 새 종목으로 추가되어 롤붕이에게 큰 볼거리가 되었다. MSI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타이밍이긴 해도 이런 국제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다. 메이저 지역 정상급 구단을 초청하여 4일간 빡세게 진행되는 이스포츠 월드컵을 보고 조금 써 봄.
1. 트리비아
1-1. 초단기대회
단 4일, 8강 싱글 토너먼트로 한 번 지면 뒤가 없는 노빠꾸 대회다. 마치 월즈 8강을 보는 듯하지만 4강까지는 BO3라 코인도 그다지 넉넉하지 않다. 월즈, MSI를 포함하여 비교적 단기간에 치러지는 국제전은 체급과 메타 파악, 전략과 컨디션이 모두 중요하지만 단 4일이란 시간은 파악할 메타도 없다가 정론이다. 이럴수록 더욱 요구되는 덕목은 유연성이다. 나를 알고, 상대를 빠르게 알고. 새로운 걸 갈고닦기보단 우리가 가진 것 중 상대에게 잘 대응할 수 있는 것으로. 그래서 그런지 4일뿐이지만 재미있는 양상이 많이 나온 볼만한 대회였던 것 같다.
1-2. 자존심 싸움
분명 대회 시작 전에는 중동 형님들의 오일머니 넘치는 유쾌한 이벤트전이었다.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 예전 드림핵 같은 느낌?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보려고 했는데 대회 직전 발표된 독특한 트로피 시스템(#)이 모든 걸 바꿔 놓았다. 패배하는 것도 분한데 팀이 지닌 키는 유압 프레스에 갈려 프로그레스 바 혹은 우승팀의 트로피에 장식된다. 더구나 첫날 각 매치 패배 시 진 팀의 주장이 직접 이긴 팀에게 키를 수여하는 장면, 그리고 유압프레스로 키가 갈리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이후로 이 대회에서의 패배느 곧 팀의 죽음으로 직결되기에 절대 져서는 안 되는 피의 대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시스템을 우리 아내에게 이야기해 주었더니 너무 자극적이라고 싫은 내색을 하더라. 그만큼 보는 맛이 있으시다는 거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선수와 팬들 모두에게 절대 참을 수 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만들어버린 오일머니 형들 참 머리 하나 잘 쓰네 싶었다. 이게 프로 스포츠지.
1-3. 대회의 위상
LoL Esports 주관 대회 이외에는 커리어로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좀 있어 보인다. 중국에서 열리는 데마시아컵을 현지 LPL 팬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모르겠다. 국내에도 케스파컵은 그다지 비중은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케스파컵은 스토브리그에 열리는 그 시기가 문제다. 몇 해 쉬고는 올해 11월 말에 다시 열린다던데 그때는 또 스토브리그다. 또 망할 것 같다.
하지만 이외에 팬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대회는 몇 있다. 아시안게임은 진정한 국가대항전으로 각 리그에서 최고로 꼽히는 선수들만 선발되어 출전한다. 선발된 선수들, 그리고 아시안게임 자체가 가진 상징성을 고려하면 아시안게임은 커리어에 포함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EWC는 많은 상금(+참가비), 메이저 상위권끼리만의 대결을 포함해 이래저래 눈여겨 볼만한 포인트가 많다. 덕분에 이번엔 큰 화제를 일으켰지만 이 대회가 앞으로 지속될지 궁금하다. 이 역시 과거 많은 대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목과 리그와 기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변하는 것 아닐지... 하지만 이 또한 보는 재미가 확실한 만큼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모두가 인정할 만한 또 하나의 커리어 대회로 자리매김하는 그림이 나오면 좋겠다.
1-3-1. GEN.G?
만약에 젠지가 LCK 서머와 2024 월즈까지 먹는다고 치자. 그럼 과거 기준으로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설레발일 수도 있으나 이스포츠 월드컵이 메이저 대회로 위상이 올라간다면 2024년의 젠지가 달성했던 그랜드슬램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애초에 당장 올해 나머지 대회를 젠지가 모두 먹어도 사람들이 그랜드슬램으로 인정을 해 줄까? 매우 궁금하구나.
1-4. 대진
이번 대회처럼 추첨식이 아니라 주최측에서 임의로 배정한 대진은 장단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스포츠 '월드컵'이라는 대회 특징을 고려한다면 무작위성이 없다는 단점보다도 각 리그의 체급차를 고려한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며 지역 내전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현재의 시스템이 주는 장점이 훨씬 더 커 보인다. 하지만 출신 국가가 섞인 LEC나 한국인 로컬 혹은 용병이 과반수 이상인 LCS 구단을 보면 롤 EWC가 과연 진정한 국가대항전인가 하는 생각 또한 든다. 롤 포함 일부 종목은 클럽 대전의 특징을 크게 못 벗어나는 듯해서 좀 아쉽다. 과거 진정한 국가대항전을 실현한 오버워치 월드컵이 참 신박했었다.
2.
T1
좀처럼 기대받지 못하는 T1이었다. MSI에서의 부진, 썩 나아지지 않는 서머 컨디션, EWC 직전에는 홈그라운드에서 리그 하위권인 KT에게 불의의 일격까지 맞았다. 덕분에 준결승까지의 6세트동안 겪었던 두 번의 패배는 팬들에게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또한 반대편에서 그 대단한 젠지를 꺾고 무실세트로 치고 올라오는 TES의 기세는 불안감을 더욱 자극했다. 하지만 대회를 지켜보는 내 눈에는 2024 EWC에서의 T1 위에 2022 월즈 DRX가 겹쳐 보였다. 산전수전 모두 겪으며 고고하게 성장한 끝에 우승을 거머쥐는 자들. 이런 세트 패배는 전략의 수정과 그로 인한 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 믿었다. 결승 1세트의 처참한 패배는 다시 한번 거름이 되었고 자신과 상대를 잘 공략한 끝에 TES를 격파하며 EWC LoL 부문 초대 우승자로 등극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정세를 지켜보는 모든 이에게 선물 같은 우승이었다. 축하합니다.
+ Faker
다들 노인 노인 하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돌아와 할 때는 해 주는 페이커. 얼마 전 MSI의 부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큰 활약을 보여주며 소중한 트로피와 더불어 파이널 MVP까지 거머쥐었다. 이로써 모든 대회 우승과 파이널 MVP를 거머쥔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문득 2022 MSI에서 심금을 울렸던 캐스터 메딕(@MedicCasts)의 그 말(#)이 떠오른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페이커는 영원하다."
GEN
이 팀은 뭘까? 그 어느 때보다도 기대받는 젠지였다. 스프링, MSI동안 보여준 압도적인 포스는 젠지의 무실세트 우승 여부를 따지는 스포츠베팅 종목으로까지 번져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온 세계가 김칫국에서 시원하게 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작년 럼자오자레 이후로 또 한 번 인상적인 밴픽을 남기고 단 한 세트도 승리하지 못하며 허망하게 무대에서 퇴장했다. 현재의 젠지에서 체급을 논하는 건 핀트가 어긋나고 결국 메타파악 문제로 티어정리가 안 되어서 생긴 사고로 판단된다. 그래도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다. 어떻게 젠지가... 초단기 토너먼트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아주 대표적인 예로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TL
LCS의 희망. 마지막 엄티가 헤맨 것이 크게 작용을 해 탈락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지만 한때는 우승팀인 T1을 턱밑까지 추격하며 격추시킬 수도 있었다. 시리즈 내내 APA가 참 인상 깊었다. 팀리퀴드는 서머동안 잘 갈고닦으면 다가올 월즈에서 무슨 일을 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번 대회 가장 많이 눈길이 가는 팀.
이외 잭키러브의 수정화살이 참 무서웠고, 플퀘 지투 경기는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시간대다 시간대다 보니 챙겨 보는 게 힘들구만. 재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