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월즈는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는 시즌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결과로 대변되는 현상에만 집중해 왔다. 리그에서의 부진을 월즈에 대입하며 이 팀은 될 거야, 이 팀은 안될 거야 하고 지레짐작했다. DK에 대한 큰 기대와 T1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가 그러했다. 이렇게 반성하는 척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표면적인 것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결과로 드러나는 현상을 항상 의심하고, 결과보단 과정에 집중해야 나중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 와중 올해 월즈를 통해 나타난 수많은 현상-많은 선수들의 열정과 노력, 빛나는 클러치 플레이, 실패로 인한 쓰디쓴 좌절, 내일을 향한 희망, 그리고 영광스러운 성취를 통해 깊은 감명과 깨달음을 얻는다.
새로운 시대, 같은 왕조의 재건 과정을 지켜보는 실로 가슴 벅찬 한 달이었다. 늘 중구난방이지만 이번 월즈를 통해 느낀 걸 다시 정리해 본다.
1. Players
Faker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그 와중에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몇가지 있다. 롤판에서 페이커가 가진 상징성, 그 플레이의 위대함. 그 와중에 사시나무 바람에 떨듯 변했던 건 나의 믿음이었다. 페이커의 실력은 변하지 않는다. 가끔은 넘어지고 아플 때도 있지만 그것들은 그의 앞길에 부는 잠깐의 강풍일 뿐이다. 태풍이 분다고 태산이 무너지지 않듯 페이커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굳건히 그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는 이번 시즌을 통해 스스로를 또 한 번 증명했고 비로소 나를 믿게 만들었다(MADE ME BELIEVE). 다시는 의심하지 않으리.
ZOFGK
14년 동안의 긴 롤 이스포츠 역사 가운데 수많은 로스터가 밝게 빛났다. 제오페구케가 최강의 로스터냐 하는 데는 이견이 있겠으나 최고의 로스터가 아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아름다운 로스터가 지속됨,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이들이 더욱 발전함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감격스럽다. 특히나 이번 월즈에선 다섯명 모두가 고른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소위 서커스라 불리는 본인들의 스타일을 이제는 완성한 것만 같다. 보통 월즈 이후로는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지만 작년에 꽃을 피웠던 그들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도록 또다시 한 데로 묶느라 애 쓴 T1 프런트에게도 참 감사하다. 이들의 선전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유스 시스템의 성공, 동일 로스터 유지의 장점 같은 이스포츠 산업 측면에서의 긍정적인 부분 또한 뚜렷하지만 선수들을 믿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다 팬들에게 돌아온다는, 우리 이스포츠 팬들에게 시사하는 부분이 더욱 크다고 본다.
또한 이번 월즈를 통해 'T1은 LPL에게 지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또다시 지키게 된 것이 가장 다행스럽다. 결승 4경기 초반 0-3 상황 가운데서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T1의 리핏 실패가 아니라 LPL을 상대로 지켜온 T1의 유구한 다전제 무패 역사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한번 T1을 지켜냈다. 이런 상성관계가 T1을 이루는 전부는 아니지만 이런 구도가 이어져야 T1의 위대함도, T1 vs. LPL의 전통적인 대결 구도에서 나오는 화제성도 유지가 된다. 이런 것들이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가급적 오래 유지된다면 좋겠다.
Bin
언젠가는 앞으로의 MSI도, 월즈도 충분히 들어 올릴 여력이 있는, 그만큼 LCK를 앞으로도 매번 위협할만한 선수. 나는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이 선수의 가능성을 보았다. 마치 22년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 후 홀로 경기를 복기하던 페이커의 모습이다. 이 선수가 결국 수년간 갈고닦으며 LCK를 향해 겨눠온 칼로 LCK의 심장을 찌른다면 무척이나 가슴 아프겠지만, 그래도 그 칼자루를 쥔 선수가 빈이라면 담담히 받아들여야겠지.
Chovy
본인이 증명하지 못하면 결국 신이 아닌 신도가 될 뿐. 그간의 쵸비는 강력함에 비해 성과가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 늘 기대받으며, 할 때는 보란 듯이 해내지만 정작 중요한 곳에서는 고꾸라진다. 참으로 안타깝다. 그래도 느리지만 점차 성장하고 있다. 이런 오랜 담금질이 언젠가 그에게 그토록 바랐던 월즈를 선사해 줄 것이다. 응원합니다.
Quad & Massu
이들은 스스로를 나름 증명하지 않았나. 뿐만 아니라 FlyQuest의 선전은 LCS의 저묾을 더욱 아쉽도록 만드는 팀이다. 그 젠지를 마지막 세트까지 추격하다니... 이런 선수, 이런 팀은 LTA라는 새로운 장 가운데서도 LTA North의 선전을 더욱 기대케 한다. 더불어 마쑤야 그렇다 치더라도 내년의 쿼드는 과연 어느 리그에서 뛰게 될까? 지금 정도라면 LCK에서도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인다.
Peanut
아쉽다. 본인에게도 좋은 기회였을 텐데. 앞으로 기회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이 선수 스스로도, 그걸 지켜보는 팬들도 더욱 간절해진다. 내년엔 피넛이 월즈 먹으면 정말 좋겠어요. 앞으로 딱 한 번이라도...
Showmaker
빛바랜 미드. DK가 반등하기 위해서는 쇼메이커로는 안된다는 말이 많지만, 나는 그래도 한때 그의 반짝반짝했던 순간과 그 안에서 한껏 느껴졌던 여유를 기억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쇼메이커가 다시 반등해 DK를 견인하면 좋겠다.
+ 근본 없는 디플러스 네이밍은 버리고 그냥 담원으로 회귀했으면 좋겠다. 그럼 사라졌던 근본력이 다시금 정상화될 것만 같다.
Daeny
감독을 여기에 끌어 오는 건 이례적이긴 하지만 올해의 대대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 우리가 그간 씨맥 감독에게서 기대했던 것이 바로 양대인 감독의 모습이다. 주어진 리소스 안에서 최대한의 것을 지향하는 것. 이런 점은 모든 감독이 추구하겠지만 양대인 감독은 그 안에서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다르다. 롤판이 얼마나 더 갈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선수들만큼이나 양대인 감독의 활약과 선전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2. Worlds Anthem <Heavy Is The Crown>
길게 쓰면 따로 하나 글 낼 정도로 정말 길게 쓸 수도 있지만... 노래는 좋은데 20년 전의 스타일 그대로라서 살짝은 촌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고, 그래도 듣다 보면 금방 적응되어 좋게 들린다. 곡보다도 뮤비의 구성이 뜨거운 감자였다. 전년도 데프트 헌정뮤비를 잘 뽑았던 만큼 올해도 페이커 헌정 뮤비를 뽑아줬으면 하는 팬들의 바람이 컸다. 하지만 이미 헌정은 올해 명예의 전당을 통해서 충분히 하고도 남을 정도였기 때문에 뮤비를 통한 헌정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뮤비의 인트로 부분에서 전년도 우승자 T1의 23년도 활약을 간단히 요약해 뒀고(깨알 같은 이스터에그-모든 길은 저를 통합니다-가 참 좋았다), 본 전개에서는 T1의 왕좌 수성 및 도전자들의 왕좌 탈환 시도 등의 전개는 여타 롤드컵 주제곡 뮤비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 뮤비의 전개 자체는 괜찮았다 본다. 다만 수많은 데프트 소리를 듣는 동양인 선수들의 모델링 문제, 그리고 롤드컵 주제가 뮤비인지 린킨파크 뮤비인지 모를 정도로 린킨파크가 많이 나오는 것도 모자라 메인을 차지하는 점은 확실히 문제인 것 같다. 린킨파크와 협업하는 것이 뽕에 찼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은 곡을 빌려 쓰는 정도인 데다 뮤비마저 그렇게 만들어 버려서 그냥 짜친다 수준. 아주 다행히도 올해 페이커가 한 번 더 우승을 해 버리는 바람에 라이엇은 다음 주제가 뮤비를 정말 각 잡고 만들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래도 이 뮤비가 한 가지 마음에 들었던 점은 트로피 세리머니 인트로에서 뮤비의 요소를 활용해 현수막에 별을 추가하는 연출적 확장이었다. 이 정도면 뮤비가 마음에 안 들었던 팬들도 어느 정도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3. Visual Art
LoL Eposrts 주관의 월즈와 MSI는 그래픽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편이다. 각 해마다 독특한 아트 스타일을 채택하여 대회 및 시즌의 이미지를 명확히 구분한다. 덕분에 그 해의 타이틀 이미지나 UI만 보아도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다시 떠오르는 듯하다. 더불어 2020년대 들어서의 월즈와 MSI, 특히 2021 MSI 그리고 2022, 2023 월즈의 아트 스타일은 정말 인상 깊다.
이건 올해 사용되었던 아트 스타일이다. 첫째는 LoL Esports X에서 각 구단의 진출 소식을 알리는 이미지 그리고 각종 티저나 타이틀 화면으로 쓰였던 균일한 분절의 그라데이션이다. 둘째는 방송 UI로 라운드마다 그라데이션의 모양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프레임/프레임 내 공간 따로 반복적으로 퍼지는 분열된 그라데이션이다. 대회의 전반적인 무대 셋업은 이 두 번째 스타일을 따른다. 셋째는 유튜브 라이브 썸네일 그리고 방송 UI로 사용된 라이브 일러스트다. 이번 월즈를 개최하는 세 지역(베를린/파리/런던)의 랜드마크와 롤 챔피언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월즈의 가장 주된 컨셉은 'fractured gradation'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회 세 가지 스타일의 아트 스타일이 혼용되어 통일성이 없다. 더구나 첫 번째 형식으로 균일한 분절의 그라데이션은 아름답지만 두 번째 형식으로 쪼개진 그라데이션은 그다지 이쁜 것 같지 않다. 주된 컨셉만 가지고 적당히 막 만든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이를 활용한 플레이 인-스위스 스테이지의 LEC 스튜디오나 결승의 O2 아레나에서의 무대 셋업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반면 파리의 아디다스 아레나에서의 무대 셋업은 정말 좋았다. 쪼개진 그라데이션을 아주 잘 활용한 느낌. 이런 대회를 보면서 항상 대회를 뒷받침하는 아트 스타일에 집중을 하는 편인데 올해 월즈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2022(#), 2023(#) 시즌 작업물들은 비핸스에 올라와 있던데 올해 것도 올라오는지 궁금하다. 과연 어떤 의도로 디자인을 했을까?
4. Songs
좋은 배경음악은 대회를 보는 이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대회가 끝난 후 음악을 통해 그때를 추억하게 한다. 대회의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밴픽, 승리, 세트 클로징 음악이다. 모든 밴픽 음악이 좋았던 2020 월즈는 아직도 그때의 밴픽이, 세트 클로징 음악이 인상 깊었던 2022, 2023 월즈는 각각 DRX의 힘겨운 여정과 성취, 그리고 처음 도입된 스위스 스테이지의 어지러운 형국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 월즈 배경음악들은 그다지 인상 깊은 것들이 잘 없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나 또한 그렇게 느꼈지만 그 와중에 그나마 기억에 남는 곡 몇 개만 꼽아 본다.
Konata Small · Disciple Theory - Do or Die
Hook 부분의 반주가 플레이 인-스위스 스테이지까지의 일부 승리 음악으로, 그리고 원곡이 커머셜 브레이크에서 나왔다. 딱 스위스 스테이지까지의 가벼운 매치에서 녹아웃 스테이지부턴 웅장하고 묵직한 곡들 위주로 선정되는 바람에 자취를 감춰서 아쉬웠음.
Sharde · Alexander Hitchens - Got It Like Dat
뉴 잭 스윙이 커머셜 브레이크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곡 분위기나 구성이 브루노 마스의 Finesse가 딱 떠오른다. 흥겹다. 이외에도 커머셜 브레이크에서 나왔던 곡 중에 좋았던 곡이 몇 개 있었는데 기억에는 잘 안 남네.
이외에는 국내 한정으로 나온 방송 클로징 음악이었던 Lauren Murray · Sunship - Red Flag(#)가 좋았다. 롤이스포츠 본채널과 비교해 보니 이런 곡 선정은 동일하지 않던데 이런 자잘한 부분은 각 지역 프로덕션의 사견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5. Tirivia
스위스 스테이지 3승 진출의 함정. 2022 시즌부터 계속 주목해 왔던 부분이지만 단기 대회에서 산전수전 겪어 가며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은 중요하다. 반대로 경기 수가 적고 긴 텀을 가진다는 것이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스크림과 솔랭을 통해 대비를 많이 한다지만 실전을 많이 뛰면서 기르는 경기 감각이 더욱 값져 보인다. 실전을 통해 본인들의 결점을 찾아 수정하고, 메타픽도 제대로 맞아 보고, 팀합도 맞춰 보아야 더욱 유동적이고 강력한 팀이 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스위스 스테이지 자체는 재밌지만 3승으로 진출한 팀에게 긴 휴식시간을 선사함으로써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이런 어드밴티지처럼 보이는 디스어드밴티지를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성캐. 맛있는 중계는 성캐가, 멋있는 중계는 전캐가 한다 했지만 이제는 멋있는 중계도 성캐가 다 하는 것 같다. 신화가 되는 동화(22 Worlds), 누군가를 위한 환영이자 누군가를 위한 환송(23 LCK SP),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밭(24 LCK SP)에 이어 이번 월즈에서는 "페이커라는 별자리의 다섯 번째 그 보이지 않던 별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라는 주옥같은 멘트를 남겼다. 성캐의 반짝반짝한 멘트가 선수들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사랑합니다.
YouTube Comment. 올해 T1의 다큐멘터리 <함께 날아오르다>에 이런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우리 아들의 이름은 그분에게서 따 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아요와 따뜻한 대댓글이 많이 달려서 참 감사했다. 페이커의 네 번째 우승이 우리 아들의 이름을 결정짓는 데 큰 영감이 된 것에 이어 아이가 태어난 해에 페이커가 다섯 번째 우승을 하게 되어 너무나도 뜻깊다. 올해 T1 월즈 재킷을 구할까 하다가 까먹고 구하지 못해 아쉬웠던 차였는데 오는 10일 프리오더 하는 재킷과 저지는 기념으로 구해 두었다가 우리 상혁이가 크면 선물로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