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기를 피하느라 조금은 일찍 떠나게 된 올해의 여름휴가. 10개월 아이를 데리고 집을 벗어나는 것조차 어려운데 며칠씩이나 멀리 떠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장거리 나들이는 올 2월 온 가족이 잠깐의 서울행으로 이미 경험해 보았다. 그래서 이번 남해행에 큰 두려움은 없었다. 휴가지를 남해로 정한 이유는 큰 볼거리나 먹을거리 등의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순전히 아난티 남해를 가보고 싶어서였다. 작년 2차례의 아난티 코브 / 앳 부산 코브 그리고 빌라쥬 드 아난티 방문에 큰 감명을 받은 우리 부부. 시간을 들여 아난티 도장 깨기를 진행하고 싶었더랬다. 그래서 기장군을 제외한 아난티 중 그나마 접근성이 좋았던 곳을 고르다 보니 남해로 가게 됨.
아난티 남해의 뿌리는 2006년의 골프&스파 리조트에서 시작된다. 그 컨셉은 약 2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하다. 아난티 남해는 골프가 목적인 투숙객을 위주로 시설이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골프를 제외한 컨텐츠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아난티 앳 부산 코브 / 빌라쥬 드 아난티를 기준으로 비교해 보면 식당도 몇 없고, 상점가나 스파 규모도 훨씬 작다.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할 것 없는 아난티 남해에 적잖게 실망할 법하다. 그렇지만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것 자체가 컨텐츠인 우리에게는 오히려 그런 컴팩트함이 오히려 좋았다. 2박 3일 정도면 아쉬움이란 한 톨도 남지 않을 정도의 규모.
우리가 아난티 남해에서 할 일은 1) 새로운 환경에서 밥 먹이고 재우며 아이와 함께 지내보기, 2) 잠깐이라도 하루 한 번은 물놀이를 시켜주기, 그리고 3) 아난티 남해 내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먹어보기 정도였다. 아난티 남해에서 먹은 것과 그 이외의 것을 나눠서 다뤄본다.
1. 먹부림 이야기
늘 그렇지만 호텔 음식 가격은 꽤 부담스럽다. 하지만 최근 아난티에서 판매하는 저니박스의 F&B 크레딧을 사용해 실질 이용 가격을 조금이라도 줄여볼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선 20만 원 구매로 40만 원어치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식대는 반값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호텔 음식이라도 2박 3일간 식비만 40 정도 쓰는 건 꽤 어렵다. 그래서 크레딧을 어떻게 쓸지 잘 고민하고 적절히 분배하는 것은 참 중요하다. 그래서 대략적인 것은 계획하되, 세부적인 것까지는 정하지 않는 선에서 즉흥적인 선택 또한 충분히 즐기기로 했다. 잔고가 모자라면 금액을 더 쓰면 되고, 잔고가 남는다면 체크아웃 전 빵집 털이 하면 되니깐 별다른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마지막 식사 후 잔고가 0으로 딱 맞아떨어져서 놀라우면서도 뿌듯했다.
남해 아난티가 아쉬운 이유 중 하나는 현저히 적은 식문화 선택지다. 수년 전에는 평일 저녁뷔페 하던 식당도 따로 있었고 지금은 카페만 하는 이터널저니도 브런치를 팔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남은 식당은 평일엔 조식만 운영하는 르블랑(주말, 성수기는 디너도 운영), 이른 새벽부터 이른 밤까지 늘 열려 있는 모비딕, 그리고 워터하우스 입구에 붙어 있는 워치유어스텝이 전부다. 워치유어스텝의 위치 그리고 르블랑의 운영시간 등 접근성의 한계를 고려한다면 온전히 이용가능한 식당은 모비딕 하나뿐이다. 그래서 아난티 남해에선 룸서비스인 BAEDAL의 중요도가 엄청 높아진다. 그러나 아난티 남해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선택과 집중을 했으리라 싶다. 아난티 남해는 위치와 골프 특화라는 특성이 맞물려 이용 고객층이 한정적이다. 전반적인 퀄리티를 떨어트려가며 많은 것들을 준비하기보다는 고객층을 확실히 만족시킬만한 몇 개만이라도 퀄리티 있게 잘 준비하자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3일간 먹은 모든 음식이 큰 아쉬움 없이 거의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반면 서로 비슷비슷해 보이는 카페가 모비딕/워치유어스텝/이터널저니로 세 개나 있는 건 또 웃긴다. 아래는 아난티 남해에서 먹었던 것.
1-1. 모비딕 : 비빔밥, 초계국수, 돌판파전
첫날 아난티 남해 도착 후 체크인 대기하면서 먹었던 늦은 점심. 모비딕은 골프 이용 고객에게 맞춘 식당이다. 이용 고객들이 나이대가 좀 있으셔서 그런지 대부분은 한식 위주고 짬뽕, 짜장 등 친근한 중식이 조금 섞여 있는 정도다. 앞서 말했듯 아난티 남해의 식당 풀이 좁은지라 모비딕은 다회 방문이 불가피했다. 처음 방문에는 한식 위주의 메뉴로 주문해 먹었다. 과거 리뷰를 보면 수육이니 순대국밥이니 하는 메뉴가 많았는데 그런 궁금한 메뉴가 없어서 아쉬웠음.
밖에서 사 먹는 비빔밥이 만족스러웠던 적은 잘 없었다. 그 유명하다던 전주에서의 비빔밥도 지금 생각하면 그저 그렇다. 그래서 사 먹는다면 가능한 육회라도 들어있어 조금이라도 차별화되는 비빔밥을 선호한다. 이곳의 비빔밥도 비슷하겠거니 생각했지만 나름 괜찮았다. 고추장 양념이 맵지 않고 달짝지근하니 꽤 맛있다. 비빔밥에 으레 들어갈법한 나물들이 즐비하지만 그 가운데 오이도 있다. 오이는 여러 재료 속에서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선 다른 나물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시간이 지나도 자꾸만 생각나는 비빔밥. 반면 초계국수는 무난하다. 구수한 닭육수를 기대함에도 평범한 함흥냉면의 맛에 가까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독특하진 않아도 새우와 오징어가 잔뜩 들어간 돌판파전은 훌륭한 곁들임이다. 파전은 수박 플래터를 제외하면 유일한 사이드메뉴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찾더라.
1-2. BAEDAL : 남해 치킨 세트
어느 호텔이건 룸서비스는 내키지 않는다. 호텔 음식이라는 보장된 퀄리티에 비해 가성비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것보단 호텔 내 검증된 여러 식당을 찾아다니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식당이 적어도 너무 적은 아난티 남해에서 비수기 평일 야간 영업을 하는 곳은 모비딕 야식당 단 한 곳뿐이다. 더구나 우리는 19시쯤 아이를 재운 후에도 아이 곁에서 멀리 떠나질 못하니 테이크아웃이나 배달이 필수였다. 모비딕 야식당도 테이크아웃이 되는 식당이었다. 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메뉴가 한정적일뿐더러 그마저도 구미가 당기는 메뉴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마파두부 참 궁금했는데요... 테이크아웃이 불가능해 먹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틀 동안 저녁은 룸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번에 주문하면서 알았는데 아난티 남해의 룸서비스는 르블랑에서 담당하더라.
첫날은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남해 치킨 세트. 치킨 한 마리와 감자튀김, 치즈볼의 구성이다. 감튀나 치즈볼은 다른 곳의 상품을 떼다 조리해 파는 것 같은 그저 그런 느낌. 하지만 치킨만은 달랐다. 호텔에서 느껴지는 디테일한 퀄리티 차이가 매 조각 느껴졌다. 이런 퀄리티라면 밖에서 이 가격이어도 1년에 한두 번쯤은 사 먹을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이 치킨은 아난티 어디에서든 비슷하지 않을까? 어느 아난티를 묵더라도 저녁 메뉴가 애매하다면 고민하지 않고 고를 메뉴가 하나 생긴 것 같다.
1-3. 모비딕 : 해물짬뽕, 돌판짜장
두 번째 모비딕 방문. 지난번엔 한식을 먹었으니 이번엔 중식을 공략해 볼 차례다. 사실 중식도 둘밖에 없다. 해물 베이스의 해산물 가득한 짬뽕, 돌판에 볶아져 나오는 따끈따끈한 짜장면뿐. 해물짬뽕은 빌라쥬 드 아난티의 루(#, 8.)처럼 독특하진 않으나 그 나름대로의 퀄리티가 탄탄하다. 요즘 종종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흔하지는 않은 돌판짜장은 그 유니크함 자체로도, 해산물이 가득한 쟁반짜장의 느낌을 주는 것 또한 좋았다. 두 메뉴 다 호텔 중식에서 오는 묵직하고 중후한 맛이다. 하지만 모비딕은 중식 전문점이 아니니 이 묵직함은 당연히 조미료 맛이겠지? 하지만 조미료를 써도 얼마나 잘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둘 다 그런 맛이었다. 다른 테이블 보니 해물짬뽕의 주문율이 꽤 높아 보였다.
1-4. BAEDAL : 해산물 떡볶이 + 계란볶음밥
전날 먹었던 남해 치킨 세트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에 비해 둘째 날 저녁으로 먹었던 해산물 떡볶이는 임팩트가 크진 않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봐도 남해 치킨 세트를 제외한 나머지 메뉴의 평은 썩 기대할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자잘한 떡은 넉넉한 국물을 떠먹기에 편하도록 잘라 놓은 것 같다. 해물도 꽤 많다. 오징어나 새우가 참 많은 것에 비해 전복이 하나만 있는 건 조금 아쉽다. 하지만 꽃게가 들어간 건 또 특이하다. 해물 향이 강한지라 우리에게 익숙한 떡볶이 맛은 아니다. 지금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백종원의 해물떡찜이 아마 이것과 비슷한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떡볶이의 매움을 중화할만한 사이드메뉴도 같이 주문했다. 주먹밥과 계란볶음밥 사이에서 고민했더랬다. 주먹밥은 그냥 밥에 김가루 얹어주는 정도인 것 같고, 계란볶음밥은 좋다는 후기를 찾아 결국 계란볶음밥으로 결정. 실제로도 나름 괜찮았다.
1-5. 르블랑 : 조식
빌라쥬 드 아난티의 르블랑 조식(#, 7.)을 생각하면 아쉬울 수 있다. 남해의 메뉴는 빌라쥬에 비해 반절조차도 안된다. 하지만 가격은 77,000원으로 동일하다. 비교대상이 있고 둘 다 경험해 보니 더더욱 객관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뷔페는 무한정으로 다 가져다 먹는 것보다도 여러 음식을 체험하는 것이 좀 더 의미 있다 싶은데 그런 재미가 없으니 참 아쉽다. 그래도 남해의 르블랑 조식도 나름대로 인상을 남기기 때문에 불만족스럽지만은 않다.
고사리 국수. 나는 이 메뉴를 여기서 처음 먹어봤다. 유니크하네 맛있네 재밌네 하면서 먹었지만 조금 찾아보니 제주의 국수바다가 원조인 것 같다. 그래도 보통은 쌀국수나 주는 조식뷔페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메뉴라 좋았다.
부챗살 스테이크는 우리 아내가 아난티 남해에서 먹었던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메뉴로 손꼽는다. 그만큼 인기도 좋았다. 그래서 사람이 좀 몰린다 싶으면 스테이크가 남아나질 않는다. 사람 없을 때 많이 먹어뒀다. 유린기는 나의 르블랑 베스트 픽이다. 첫날 남해 치킨 세트도 그렇고 유린기도 그렇고 닭을 참 잘 튀겨 놓았다. 같이 버무려진 소스가 조금 짜긴 했지만 닭튀김이 훌륭해 짠맛이 잊혀진다.
광어회와 숭어회. 이외에 연어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연어는 다 빠지고 이 둘만 올라왔다. 회 컨디션은 좋았지만 인상 깊지는 않았음. 최근엔 회는 횟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씩 더 견고해지는 듯하다. 새우리가토니. 묵직한 크림의 맛이 기분 좋다. 하지만 부챗살이랑 유린기에 밀려 별로 손은 안 갔다.
이외에도 메뉴는 적지 않을 만큼 있었지만 특기할 만한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사진도 찍어는 놨는데 별로 쓸 말이 없다. 결론은 다섯 번의 식사 중 가장 불만족일 정도로 좀 아쉽다. 디너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도 있으나 이곳 르블랑 업장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지라 디너도 별반 다를 바 없겠다 싶다.
2. 기타
우리가 이번에 묵은 곳은 펜트하우스 A. 방, 특히 침실이 분리되어 있어서 좋았다. 침실 하나를 10개월 아이가 혼자 쓰기에는 너무 컸지만 이전부터 유지해 오던 분리수면을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 7동은 여러모로 최고의 위치였다. 앞으로는 아난티 남해 부지와 18홀 골프장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멋진 뷰, 뒤로는 고즈넉한 마을 뷰가 참 아름다웠다. 바로 아래 이터널저니도 있고 해서 아이 데리고 다니기 참 편했다. 근데 어느 아난티건 방은 멋들어지게 꾸미면서 비데 설치할 여유가 없는 건 굉장히 아쉽다. 숙박비가 싼 것도 아니면서.
부지가 작아 조금만 걸어도 모든 시설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10개월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엔 조금 어렵다. 도로가 평탄하지 않고 고저차가 조금 있어 유모차 이용도 쉽지 않다. 더구나 전자렌지는 아난티 남해 전체를 통틀어 클럽하우스 로비에 단 하나 있다. 아이 이유식을 데우기 위해 클럽하우스까지 왔다 갔다 하는 건 정말 귀찮았다. 다만 이동용 카트를 신청하면 어디든지 태워다 준다. 지나가는 걸 볼 땐 별로 빠르지 않은 것 같지만 직접 타보면 꽤 빨라서 재밌다. 처음에는 잘 이용하지 않다가 둘째 날부터는 온 가족이 이동할 때마다 항상 이용했다. 카트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면 영아와 함께 지내기엔 기장의 아난티 코브보단 오히려 더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든다.
앞서 말했듯 남해 아난티는 골프 이외 컨텐츠가 거의 전무하다. 심지어 피트니스도 없다. 아난티 부산 앳 코브의 그것과 이름이 같은 워터하우스는 규모가 훨씬 작다. 이터널저니 1층 앞에 펼쳐진 야외수영장은 규모도 작고 우리가 방문했던 6월엔 수온도 낮은 편이라 10개월 아이와 함께 놀기는 좀 어려웠다. 잔디광장 산책로는 조경이 참 아름다운 대신 규모가 작아 돌아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해안산책로는 꽤 길지만 매우 험하고 갯강구 투성이다. 심지어 더하우스로 향하는 등대 주변의 길목은 조경이 없다시피 해서 아난티 부지가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산책로 종착점인 더하우스까지는 어떻게든 걸어서 가고 돌아올 때는 카트를 불렀다. 근데 의외로 산책로를 카트로 가로지르니 기분 좋더란 말이지. 이 와중 이터널저니 상점가 내에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방이 마련되어 있는 건 또 놀랍다. 하지만 우리가 갈 땐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장소는 딱 봐도 아난티다!'라고 할만한 특징적인 포토 스팟이 없다. 아난티 앳 부산 코브의 시그니처 통로, 빌라쥬 드 아난티의 드넓은 정원과 상점가 등. 건물 외관까지도 독특한 두 군데에 비해 아난티 남해는 클럽하우스조차도 평범하게 생겼다. 작년에 정말 큰 히트를 친 '이상한 나라의 아난티'의 흔적이 아주 몇몇 군데에만 메아리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다만 호텔 주위 경관은 참 아름답다.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에게도 드넓은 초원 뒤로 바다가 펼쳐진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런저런 아쉬움도 많았지만 결론적으로는 2박 3일간 잘 묵었다. 골프 안 치는 사람에게 아난티 남해는 2박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여기는 앞으로 큰 변동점이 없다면 다시는 안 찾아갈 것 같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아난티 앳 강남이나 더더욱 골프 특화 느낌인 아난티 클럽 제주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고, 가평의 아난티 코드 정도만 한번 방문하면 아난티 도장 깨기는 충분하다 싶다. 다음 아난티는 언제쯤 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