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이랄 것이 있을까?
긴 대학생활을 끝냈다. 우려했던 국시는 무슨 그런 걱정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냐는 듯 정말 무난하고도 남을 점수로 합격을 했다. 모병원 인턴으로 남고 싶었으나 예전과는 달리 모병원 지원이 인기를 탔기 때문에 혹시 경쟁에서 밀려 강제 공보의행이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을 했지만 한자리 미달로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았다. 요즘 같은 때에 졸업하기도 취업하기도 힘들다지만 그런 면에서 나는 참 복받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이 바닥은 들어오기가 힘들지만 한 번 들어오고 나면 그럭저럭은 해 낼 수 있는 곳이라 느낀다. 아직은... 온갖 권모술수와 상대평가로 점철된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대학지원을 거쳐 의과대학에 합격을 하면 그 이후에는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의사 되기는 어렵지 않다. 간혹 그 남들 하는 만큼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이고 나도 잠깐 그러 뻔 했지. 다만 의사 자격증을 따고 그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는 다시 문제가 된다. 개인의 욕심과 포부에 따라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간다. 그 가운데 본인이 만족스러운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경우도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어디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
환자를 사랑하는 의사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다. 인턴이 하는 의료행위는 정말 바닥 수준이지만 그래도 병원 내에서는 그 누구보다 환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위치이다 보니 우리 말투 하나 손짓 하나나 참 조심스럽고 신경써야 할 부분이다. 다만 내과같은 것 하면서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콜에 파묻혀 내 앞에 있는 환자를 그러한 마음으로 보지 못할 때에는 참 마음이 아프다. 어쩔 수 있는 부분인데 우리도 사람이다 보니 그게 마음먹은 만큼 잘 안 되지만 그래도 내 양심이 마지노선을 지키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더 잘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은 하는 것 같다. 지금보다 훨씬 더 잘 해야 하는데.
그래서 지금은 웬만큼 벌고 있다. 인턴 스케줄에 따라 '이만큼 일했는데 이것밖에 안되나'하는 달이 있는 반면 '내가 이만큼 받아도 되나'하는 달이 있는 건 천차만별인듯.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내가 하는 일보다 조금 더 받는 느낌이고 무엇보다 사회 초년생 치고는 이정도 금액은 크다 싶다. 어쨌든 그걸 등에 업고 이것저것 해결해 나가고 있다. 밀린 학자금 대출을 거의 모두 상환했고, 적금통장도 만들었다. 후자는 자기주도적이지 않아 조금 아쉽지만 지금보다 더욱 삶이 여유로워지고 내 주위의 것을 조금 더 돌아볼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하나둘씩 찾을 것이고 좀 더 투자를 할 것이다. 사실 의대생들은 골방에 쳐박혀 책만 보느라 관심 있지 않으면 학교 밖의 것을 알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막상 월급을 받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이 받으니 대부분 저축을 하게 되는데 그것도 얼마나 계획적으로, 효과적으로 하느냐를 잘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도 잘 모른다. 더 알고 싶다.
사실 씀씀이는 이때까지와 비교해서 많이 는 편이다. 큰 것을 지를 때는 조금씩 고민하게 되지만 그래도 보다 작은 것에 돈을 쓸 때는 고민하게 되는 것이 많이 줄었다. 다만 인턴은 돈 나갈 곳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생활을 병원에서 지내며 기본적인 의식주는 대부분 충당받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번씩 나가서 사회생활하는 다른 친구들이랑 약속잡으면 내가 조금 더 쓰는 편이다.
해외여행. 돌아보면 지날 날 동안 기회가 많았음에도 여건이 따라주질 않아 잘 나가질 않았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시간상의 제약으로 나갈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고 생각하니 기회가 될 때마다 꼭 밖으로 나가야겠다 싶다. 그래서 올해 받은 두 번의 휴가를 모두 여행하는 데 썼다.
대만과 홍콩은 즐거웠다. 특히 대만은 정말 재밌었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여정을 준비하고 짜여진 일정대로 따라가는 여행이었다면 올해를 기점으로 여행을 나 스스로 준비하고 일정을 짤 수 있게 되었다. 자주적인 느낌 좋아요.
생각보다 영화를 많이 봤다. 어림잡아도 올해만 60편 이상은 본 것 같다. 인턴생활이 이렇게 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올해 본 영화중엔 [위플래쉬]가 단연 최고. 캐러밴 들으면 위몰아치는 드럼 너머로 나는 저렇게 열정적인 적이 있었나 하고 인생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것 같다. 레지던트때도 지금만큼 보고 싶은데 병원은 나를 그런 월급 루팡이 되는 것을 가만 두지 않겠지.
여건상 콘솔은 못 하게 되고 의도치 않게 롤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위유의 뽐뿌가 엄청 많이 왔으나 잘 넘긴 것 같다. 게임은 인턴때까지만 하고 레지던트때는 줄여야지.
연애를 아직도 못 하고 있지만 아쉽거나 급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하면 좋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못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이런 것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인생이 정말 무미건조해졌다. 평소엔 병원에서 콜 받으면서 일하고 잠도 병원에서 자다가 오프 받으면 잠깐 집에 가서 저녁먹고 가족들 얼굴보고 이야기하고 롤하거나 약속잡아서 친구들 얼굴이나 한번씩 보고 그러다 또 병원 들어가고...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이상 이런 생활은 피치 못할 것 같다. 더불어 날짜개념도 없어졌다. 공휴일 주말 상관없이 짜여진 스케줄대로 일하다 보니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없어져서 그렇다. 매주 나가던 교회를 근무스케줄상 예전처럼 많이 나가지 못하게 되는 건 아쉽다. 그게 점점 당연한 것이 되니 그것도 너무 싫다.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말 무섭게 빨리 지나간다. 벌써 2016년이 올 줄이야.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그냥 시간만 지나간다 하니 참 허무하다 싶다. 더불어 이런 생활을 4년이나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 감내를 해야겠지. 2016년은 실력과 멘탈을 모두 겸비하는 알찬 한 해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