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만 보고 문명하면서 만들기만 했던 루브르 박물관을 눈 앞에서 직접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런던의 영국박물관, 로마의 바티칸박물관과 더불어 유럽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루브르 박물관. 다른 두 박물관보다도 유리로 된 피라미드라는 아주 독특한 외관으로 다른 두 박물관보다도 일반 대중들에게 더 인지도가 높은 곳임과 동시에 그를 입증하듯 한 해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박물관이기도 하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궁전을 박물관의 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프랑수아 1세때부터 처음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하여 루이 13세 시대에 200점, 루이 14세 때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의 적극적인 예술진흥정책으로 수집품이 급증하였다. 이렇게 선대 왕들이 오랜 시간동안 모아놓은 수많은 양의 미술품을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처음 공개하기로 결정하였고 미술관으로 정식 발족한 이후 나폴레옹의 정복 활동 중에서 추가된 전리품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지금의 대미술관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의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의 작품, 아프리카, 중동의 회화 · 공예 · 조각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루브르 박물관은 미술관인 셈이다. 하지만 Musée라는 말 자체가 (특히 미술관을 지칭하는)박물관을 뜻하기도 하고 함무라비 법전이나 루브르의 역사를 보여주는 해자 등의 비미술품, 그리고 그렇게 분류하고 싶다면 미술품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어쨌든 타국의 유물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뼛속까지 깊은 미술관이라고 보기도 힘드니 그냥 박물관이라고 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닌 표현인듯 하다.
루브르 궁전으로 둘러싸여진 광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한다.
이런 곳도 그들에게는 쉼터가 된다. 그들의 쉼터는 스케일도 아름다움도 아주 대단하면서 주어진 것을 아주 잘 누리면서 사는 부러운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카루젤 개선문. 이번에 보고 나갈 때 또 보고 내일 와서 한 번 더 볼 것이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루브르 박물관을 찾은 모습. 약 15,000명에 달하는 하루 평균 방문자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인 유리 피라미드. 사진이 좀 어둡네요잉.
유리 피라미드는 박물관 내부로 들어오고 나서 보아도 참 장관이다. 하늘이 더 맑았더라면 아주 좋은 장면을 목격할 수 있을뻔 했다.
프랑스부터는 내 담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계획을 짰다. 아마 프랑스 입국 후 캐리어는 우리가 처음 내렸던 파리 북역의 락커룸에 맡겨 놓고 나오는 것으로 계획이 짜여져 있던것 같은데 파리 북역에서부터 계속 헤맸던지라 락커룸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결국 루브르 박물관까지 캐리어를 끌고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가지 다행인 것은 루브르 박물관에는 무료로 소지품을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여섯개의 캐리어를 모두 거기다 맡겨처박아 놓고 보다 더 홀가분하게 루브르 박물관을 활보할 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개장시간은 오후 6시까지이지만 특별히 수요일은 저녁 9시 45분까지 개장하므로 이를 참고하여 루트를 짜도 괜찮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성인요금 10유로이며 한가지 아쉬운 것은 학생할인이 적용되지 않는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루브르 박물관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루브르 박물관의 모든 작품을 다 보려면 한 작품당 2초씩 본다고 했을 때 2개월, 15분씩 본다고 했을 때 2년이 걸린다는 말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마침 또 입장이 예상시간보다 조금 늦었던 우리에게 폐장시간까지 남아 있는 시간이 두시간 반 정도였고 우리는 최대한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꼭 봐야 하는 리스트를 몇 개 세웠고 영국박물관처럼 최단루트를 잡아 최대한 신속하고 실속있게 루브르를 돌아보기로 했다.
꼭 보아야 할 것은 다음으로 잡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것을 보기 위해 루브르를 찾을 것이고 실제로 이 작품들 근처만 가도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모여 있기 떄문에 멀리서 봐도 아 대충 여기쯤이구나 싶을 것이다.
1. 함무라비 법전(1층 리슐리외관)
2. 밀로의 비너스(1층 쉴리관)
3. 사랑의 신의 키스로 소생된 프시케(1층 드농관)
4. 미켈란젤로의 포로(1층 드농관)
5. 사모트라케의 니케상(2층 드농관)
6. 나폴레옹 1세 대관식(2층 드농관)
7. 모나리자(2층 드농관)
8. 가나의 결혼식(2층 드농관)
9. 가브리엘 데스트레 자매 초상화(3층 리슐리외관)
터키탕도 보고 싶었는데 루트상 너무 멀리 있어서... 이들을 포함한 주요 작품들은 데스크에서 받을 수 있는 관람 안내서에 모두 다 표시가 되어 있고 이 관람 안내서는 한국어판도 있기 때문에 매우 편하게 관람할 수 있다. 꼭! 챙겨 가도록 하자.
루브르 박물관 곳곳에 붙어 있는 경고문. 기존 작품을 활용하여 재미있게 재구성한 것이 포인트.
그럼 주요 작품들만 조금씩 훑어 보도록 하자. 사실은 내가 자료 찾아보고 코멘트 달고 싶은 것들만.
미켈란젤로의 포로로 일명 죽어가는 노예(1513년경). 하지만 작품명과는 다르게 노예의 표정은 보다 더 황홀하고 행복한 표정이다. 모진 삶을 산 노예에게 있어 죽음은 그동안의 멍에를 풀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이자 축복이 아닐까?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 강렬한 저항에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섬세한 근육 곳곳에 묻어나는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여기에 있는 <죽어가는 노예>와 <반항하는 노예>를 만든 후 4개의 노예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으나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히드라와 싸우는 헤라클레스. 누가 만든 작품인지 잘 모르겠다. 이미 히드라의 목이 몇개 잘린 모습이 보인다.
안토니오 카노바의 사랑의 신의 키스로 소생된 프시케(1793년). 아프로디테에게 시련을 받는 프시케가 신의 미를 탐하여 페르세포네의 아름다움을 담은 상자를 열어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되고 그런 그녀를 에로스가 발견하고 다시 깨우는 그 순간으로 키스하는 두 육체의 역동적인 모습과 삼각구도가 눈길을 끈다.
작자 미상의 보르게스의 검투사(BC 100년). 사람의 형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강조했던 당시의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포즈가 워낙 독특하다 보니 옆에서 따라하는 사람들이 좀 많았다ㅋㅋ
작자 미상의 '사모트라케의 니케'로 더 잘 알려진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BC 331년). 1863년 에게해 북서부에서 발견되었을 때는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와 팔 부분이 없는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더욱 처참한 모습이었으나 프랑스 복원기술의 은혜를 입은 덕택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사실 두 날개 중 왼쪽 날개도 발견을 하지 못해 오른쪽 날개를 본따 이어붙였다고 한다. 어쨌든 이미 소실된 부분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상이 원래 무슨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약 100년이 지난 1950년경 이 상의 한쪽 손이 추가로 발견되었고 지금은 승리의 나팔 살핑크스를 불고 있는 복원도까지 나왔을 정도에 도달했다. 원래 이 상은 돌로 만든 전함의 뱃머리 부근에 서 있었다고 한다.
니케의 날개는 현재 나이키 로고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여신 앞에 잔뜩 모여 있는 사람을 찍고 싶었는데... 조금 화각이 넓었다면 좋았을 것을.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 대관식(1804년).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관을 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아내인 황후 조세핀에게 관을 하사하는 장면이며 좀 더 재밌는 것은 조세핀 이전 자신의 관을 하사받을 때 교황이 나폴레옹에게 관을 씌워준 것이 아니라 교황이 든 관을 나폴레옹이 빼앗아 직접 썼다고 한다. 그만큼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으며 그를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나폴레옹의 요청에 따라 이 그림을 처음 그렸을 때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관을 머리에 쓰는 그 장면을 그릴까 했으나 분명 불경스러운 장면이었기 때문에 망설인 것도 있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 자신이 그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남편이 부인에게 직접 관을 하사하는 자상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주제를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앞부분의 관객이 비어있는 이 그림의 구도 또한 포인트로 마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관식에 직접 참여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구도를 지니고 있다.
이 그림은 베르사유 궁전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똑같은 작품이 4개나 제작되었다고...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1819년). 19세기 초 아프리카 식민지를 개척할 목적으로 프랑스는 군함 3척을 마련했고 이 중 한 척이 제목에도 나타나 있는 메두사호다. 하지만 문제는 이 배의 함장은 귀족출신이나 항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인물이었고 그 문제는 메두사호의 발목을 잡아 아프리카 연안에서 난파당하게 된다. 처음 메두사호에 올라선 선원은 총 400명이었으나 이 중 반도 안되는 인원인 149명이 급조된 뗏목에 몸을 실어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무능하고 골치아픈 함장은 이 뗏목을 끌고 가던 구명정의 밧줄을 끊고 혼자 달아나 버린다. 그 이후 이 뗏목은 12일동안이나 정처없이 바다를 떠돌아 다니게 되었고 결국 같이 항해를 했던 아르귀스호에 의해 구조가 되었으나 그동안 살아남은 사람들은 15명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된 후였다. 이 사건은 이렇게 잊혀가는듯 했으나 그 배에 타고 있었던 한 의사의 고백에 의해 다시금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의 고백은 누구나 예상하겠지만 뗏목 위에서 굶주림에 지쳐가던 선원들이 죽은 동료들의 살과 피로 연명을 했다는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제리코는 이 희대의 사건을 당시 생존자들의 말과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통해 재구성하여 새로운 배를 발견하고 구조를 요청하는 장면을 그림에 옮겼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프랑스 혁명을 이끌던 나폴레옹이 쫓겨난 후 샤를 10세가 왕위에 오르자 나폴레옹을 피해 도망갔던 귀족들이 다시금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귀족과 상생하려던 샤를 10세는 프랑스 혁명 이후 누구나 법 앞에서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시민들에 의해 의회가 새롭게 부활하자 칙령을 통해 의회를 해산시켜버렸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샤를 10세에 대항하여 다시금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들라쿠르아는 그들을 기리기 위해 그때의 장면을 자신의 화폭에 옮겨 담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자유의 여신은 밀로의 비너스를 모델로 삼았으며 백년 전쟁 때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를 상징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또한 들라크루아는 자기 자신을 여신 옆에(모자를 쓴 남자) 그려놓았다는 점 또한 특이하다. 다행히 이들의 용감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루브르 최대의 던전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세기 경).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나 원래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이 거론되어 여기서마저 다루면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넘어가고 특별히 다빈치만의 독창적인 스푸마토 기법을 이야기하도록 하자. 자연을 관찰한 결과 다빈치는 대기 속의 수분과 먼지가 빛을 난반사시켜 멀리 있는 물체의 윤곽선은 흐리게 보인다는 사실을 작품 속에 그대로 가져와 멀리 있는 배경은 흐리게, 가까이 있는 배경은 뚜렷하게 나타냈다.
루브르 박물관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방에 들어서면 방도 꽤 넓은데 그만큼 사람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유명 작품 앞에는 그냥 사람이 많다 정도인데 위에서도 말했든 모나리자 앞은 정말 던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며 가까이 접근하여 작품을 훼손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기 위해 모나리자 앞에는 따로 경비도 서 있고 경계선도 다른 작품보다 더 멀게 쳐 있고 거대한 유리로 잘 보호되어 있다. 모나리자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들로 적어도 10분은 투자해야 엄청난 인파를 뚫고 맨 앞줄로 갈 수 있다. 사실 가장 가까이 가도 모나리자는 꽤 멀리 걸려 있기 때문에 작품 전체를 두 눈 가득 담기가 매우 어렵다.
모나리자 던전 바로 맞은편에 있던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식(1562-1563년 경). 성서의 물을 포도주로 만든 그리스도의 기적을 그린 장면이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킨 그리스도는 그림의 가운데에만 자리하고 있을 뿐 아주 작게 그려져 있으며 전체 그림을 보면 그다지 부각되었다고도 볼 수 없는 수준이다. 베로네세는 그런 종교적인 장면을 세속적이고 호사스러운 의식으로 묘사해 놓았던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크기가 큰 작품이다. 하지만 곳곳에 기적의 순간을 잘 묘사한 부분도 있으며 그리스도가 배치된 구도를 보면 이후에 있을 최후의 만찬을 암시한다는 의견도 있다.
작자 미상의 밀로의 비너스(기원전 100년). 루브르의 명실상부한 3대 보물 중 하나로 꼽히는 밀로의 비너스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으로 이름이 저렇게 붙은 것은 그리스의 밀로라는 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뻔한 이유이다-_-; 고대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인체의 황금비가 이 상에 완벽하게 남아 있다. 팔이 있었을 때는 어떤 포즈였을까?
영국 박물관에서 보았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날개달린 황소. 저게 황소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현대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으로 일컬어지는 함무라비 법전. 기원전 1700년경에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법전으로 성경보다 더 먼저 쓰여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으로도 통한다. 그 유명한 '눈에는 눈, 뼈에는 뼈, 이에는이'라는 법조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매우 문학적이며 역사적 가치가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독특한 포즈가 인상적인 가브리엘 데스트레 자매. 우측의 여인이 앙리 4세의 애첩 가브리엘 데스트레이며 그옆은 동생인 비야흐 공작 부인이라고 한다. 가브리엘은 정부만 56명에 달하는 한량꾼인 앙리 4세가 첫눈에 반해버린 여성으로 유능해서 정치적인 조언 뿐 아니라 직접 실무를 볼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저 앙증맞으면서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민망함을 자아내는 포즈는 가브리엘이 여성으로서 자식을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는 건강한 여성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브리엘이 손에 쥔 반지는 앙리와의 결혼을 소망하는 가브리엘의 속내라고.
야콥 요르단스의 최후의 심판. 이건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그림만 보면 '심판'을 떠올리게끔 하는 작품인 것 같다. 마태복음 24-25장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것으로 전쟁, 기근, 지진, 박해와 가짜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가 나타나는 세상의 종말의 전조 이후 참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장면이다. '최후의 심판'은 그 장면을 보고 지칭을 하는 것이지 그림에 붙여진 유일한 제목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이라 이름이 붙여진 작품은 정말 많다. 가장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벽 위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그 거대한 그림은 내 마음을 충분히 뒤흔들고도 넘쳐 흐를 정도로 대단했다. 근데 왜 여기서 시스티나 성당 이야기를 하나여
못 본 것이 많지만 그 부분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대단한 곳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