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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관 후기

0. 서론
전역 신고식 전날 다른 군의관들이랑 회식을 하고 늦은 시간에 귀가를 한 뒤로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별 것 없는 군의관 시절, 군인에서 다시 민간인으로 변하는 신분의 변화는 그리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면 내심 새삼스럽긴 했나 보다. 결국 그날은 잠자리에 누운 뒤로 30분 이상 잠을 설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무사히 전역식을 마치고 여러 사람들에게 축하도 많이 받았다. 참 복에 겹다.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군의관으로서 내가 보냈던 시간들은 참으로 좋은 시기였다. 전체적인 평이 좋았다는 것이지 그중에는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것도 있다. 그 둘을 큰 카테고리로 묶어 하나씩 풀어본다. 일반적인 군의관의 경험이 아니라 순전히 나에게 국한된 경험이라 다른 군의관이 보면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1. 좋았던 것
 
1-1. 본가에서 가까웠음
나는 역종분류 전 군의관이 아닌 공보의 배치를 예상했다. 신경과는 과 특성상 노인성 질환의 비중이 크다. 물론 젊은 환자들이 없는 과는 아니지만 그마저도 대부분은 희귀질환에 속한다. 결론적으로는 우리 과는 청장년 위주의 군인들에게는 그다지 수요가 없다. 실제로도 군의관 TO가 별로 없다고 들어 왔다. 더구나 나는 높은 확률을 가리는 게임에서는 운이 좋은 편이기 때문에 무난히 군의관 TO를 피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짜잔! 절대라는 건 없군요.
 

아무도 보는 이 없이 그때그때 드는 짤막한 생각을 썼다 지웠다 하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이 해에 신경과 전문의 취득 후 병역을 이행해야 하는 사람이 총 34명, 그중 군의관 TO가 5명이었는데 내가 그 다섯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해서 쓴 트윗이다. 보충역이 뜰 줄 알았는데 현역이 뜬 것부터가 기가 찼고, 총 5개의 군의관 TO 중 육군이 세자리, 해군이 한자리, 공군 한자리 중 내가 그 마지막 한자리를 차지한 것이 더욱 쇼킹했다. 2.9%라니... 하지만 요즘 가챠겜에서 이 정도의 확률은 혜자죠? 그나마 공군 자체에 배정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의사가 이행할 수 있는 병역 중 가장 편하다는 3공(공보의, 공군, 공익)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공군은 근무지가 대부분 도시 부근이라 너무 외진 곳으로 배치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나는 나이 30 넘게 타지생활을 해 본 적이 잘 없었고 이제는 타지생활을 피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훈련소로 향하는 동안에는 특별히 각오를 좀 했더랬다. 하지만 본가 근방으로 배치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훈련소에 있었던 약 2주 동안 이래저래 아귀가 딱딱 잘 맞아 본가에서 20분 거리의 비행단으로 배치가 되었다. 전공의 시절 출퇴근 거리보다 훨씬 짧은 거리를, 그것도 본가에서 출퇴근하며 복무할 수 있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3년이었다.
 
1-2. 많은 시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6+1년, 인턴+레지던트 5년. 근 20년 동안 큰 쉼 없는 삶을 쭉 살았다. 군의관은 표면적으로 주말을 제외한 거의 매일 출퇴근을 하지만 병원 시절과 비교하면 업무의 로딩 자체가 극히 낮다. 그렇기 때문에 출근을 해서도 시간이 남고 퇴근 후에는 더더욱 시간이 남는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왔던 나에게는 충분히 쉴 수 있는, 혹은 그동안 해 보지 못했던 것에 도전하는 좋은 기회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3년 동안 마냥 놀기만 하면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을까? 그래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자 부단히 노력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3년간의 후기(#2020#2021#2022)로 갈음하고, 큰 것만 나열하자면 1) 결혼, 2) 운동, 3) 마음 공부이다. 예전에는 눈앞의 것 처리하기 바빠 뒤돌아 볼 생각을 전혀 못했는데 확실히 시간이 많아지니 생각도 많아진다 싶다. 다만 내 마음에 비해 인생의 공부가 덜 된 것 같아 걱정스럽다. 이건 시간이 지나며 차차 배워 나가야겠지? 요즘 사회 전반적으로 개인주의가 점차 팽배하는 가운데 앞으로 일할 병원에서도 MZ들이 판을 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과연 나는 어떤 것을 경험하고 무엇을 생각하게 될지 참 궁금하다. 일이 힘든 건 좋으나 사람이 힘든 것은 정말 싫은 것인디.
 
1-3. 높은 서열
모든 군의관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군의관은 소속한 부대 내에서 짬이 높다. 반면 내가 근무했던 비행단은 규모가 꽤 컸고 비행단 전체로 확대하면 영관급 장교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결국 우리 군의관은 기 하나 제대로 펴지 못하는 쭈구리였다. 하지만 군의관은 적어도 우리가 속한 의무전대 내에서는 전대장을 제외하면 서열 2위였다. 실제 편제도 전대장 아래에 항공의무실장(군의관), 진료실장(군의관)인지라 적어도 의무전대 안에서 기획하고 진행되는 업무와 관련해서는 군의관들의 영향력이 크다. 컸...나? 더불어 우리 의무전대는 군의관이 12명으로 의무전대 내 어느 직종보다도 인원이 더욱 많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군의관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서열을 스스로의 안락함을 위해 악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코비드 19 판데믹이 겹쳐 정말 바빴지만 군의관을 제외한 다른 직종의 많은 분들이 이래저래 잘 대우해 주고 도와주신 덕분에 3년간 일하기 수월했다. 하지만 과연 부서 내 서열이 높다고 복무 중 진행되는 모든 업무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가? 그건 아니었다. 이것은 후술 할 경직된 분위기에 기인한다.
 
1-4. 좋은 사람들
앞서 말했듯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군의관들이 많아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정신 없어 다들 날이 서 있는 병원 시절과는 달리 아주 편한 로딩 가운데 다들 마음도 둥글어져서 모난 사람 하나 없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았음. 직장동료끼리 모두 모여 서로 형동생 하기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다들 강제징용의 아픔을 안고 3년간 처박히는 설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니 적어도 군의관끼리는 서로 화합하며 풀자고 했다. 더구나 내가 3년간 거쳐간 사람들은 다들 사람들이 좋아서 서로 뭘 부탁해도 잘 들어주고, 갑자기 군의관 손 필요할 일 생기면 알아서 자리 잘 채워주곤 했다. 그리고 생소한 파트 선생님들 만날 기회도 있어서 좋았다. 여기가 아니면 언제 치과나 수의학과 선생님과 이것저것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을까? 심지어 이야기할 일은 잘 없었지만 한방과도 있었다. 매년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3년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마지막 회식 하고 집에 가는데 헤어진다는 게 참 아쉽더라. 그래도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행운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 즈음 결혼을 실행하는 혹은 그 과정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래저래 공감대도 잘 형성되더라. 새신랑들ㅋㅋ
 
1-5. BX
보통 PX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 군 내 마트. 공군은 Post-가 아닌 Base Exchange를 써서 BX라고 한다. 왜 굳이 BX를 좋았던 점으로 꼽았냐고 하면 BX는 그만큼 정말 쌌기 때문이다. 내가 있었던 곳은 BX에서 과일이나 채소 등 신선식품도 취급을 했지만 일반 민간 대형마트 등과 비교했을 때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큰 메리트가 없어서 잘 이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산품은 어마어마하게 쌌다. 하겐다즈 파인트 기준으로 홈플러스에서는 18,00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BX에서는 6,000원도 안 했다. 나는 구매 할 일이 없어 혜택은 못 봤지만 주류만큼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저렴했고 그 이외에도 과자류나 냉동식품, 생필품 등도 일반 시중에 비해 가격이 꽤 저렴했다. 때문에 결혼 이후에는 BX에서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은 수시로 방문해서 구매를 하니 가계비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최근 군인 월급에 대한 문제점이 자꾸 거론되고 있지만 군인은 돈 아낄 일이 종종 있다. 영외로 자꾸 나가게 되면 그만큼 지출도 많아지지만 (의)식주를 포함한 많은 부분이 영내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해결이 된다. 가끔은 기차도 공짜로 타고 영내에서 헬스도 골프도 저렴하게 누릴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적은 월급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기를 찍고 꾸역꾸역 복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적은 월급이 정당하다는 건 절대로 아니고...
 
 
2. 나빴던 것
 
2-1. 군대의 특성: 경직된 사고
상명하복, 합리적인 사고가 통하지 않는 경직된 업무문화. 과연 이게 누군가가 책임을 질 것까지의 일인가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고, 꼭 책임을 물어 일벌백계해야만 할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아이러니한 체계. 대부분의 것은 공본에서 정해서 하달되고 각 부대에서는 공본의 것을 받아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거의 그대로 따랐다. 코비드 판데믹과 관련하여 각 부대의 방역 지침을 정하는데도 군의관들이 긴밀하게 협조하여 세부사항을 결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시행되는 지침을 뜯어보면 군 내 실정과 맞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공군 이야기는 아니지만, 코비드 19 판데믹 초창기에 벌어진 양파 사건(#)은 이런 업무문화에서 나온 전형적인 탁상공론 아닐까?
 
몇가지만 풀어 보자면... 내가 배치받기 직전 COVID-19 판데믹 초창기에는 부대 전체를 폐쇄하여 아무도 오가지 못하게 하거나 영외로 출타하더라도 자택 이외에는 아무 곳도 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었다더라. 그 당시 미지의 병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 사회적 분위기와 군대가 가진 특성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싶다. 그렇다고 병원 등 꼭 필요한 외출마저 금지하는 것도 문제고(의무전대는 모든 병을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부대 전체를 폐쇄할 경우 외부로부터의 감염 방어는 용이할 수 있으나 내부로부터의 확산에는 더욱 취약할 것이라는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당시 복무 중이던 군의관 선배 하나가 총대 메고 여기저기 항의하고 찔러서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고. 이외에도 아침 조회 겸 야외에서 체조를 하는데 꼭 체조 시작하는 시간과 맞추어 전투기가 뜬다. 그래서 다들 전투기 소음 때문에 귀를 막고 체조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 있는 일이 거의 매일 아침마다 반복된다. 전투기를 그 시간에 띄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간을 피해서 체조를 해야 하지 않았나? 무지막지한 전달 체계도 기억인 난다. 코비드 관련하여 국방부를 통해 타 의료기관에 파견 나갈 일이 많았는데 미리 고지해서 인원을 미리 뽑는 것이 보통이지만 꼭 한 번씩 전날 급히 인원 차출을 하는 일이 생긴다. 이 외에도 말하자면 많지만 답답했던 건 여기까지만... 그간 공군은 육군이나 해군에 비해 이런 업무적인 유연성 면에서는 그나마 좀 낫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군대는 군대다 보니 아쉬운 부분이 있구나 싶었다.

2-2. 결국엔 양호실
군의관은 흔히 돌팔이라는 말들을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군대는 돌팔이 아닌 사람들을 모아다가 돌팔이 진료를 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곳이다. 군의관은 다양한 곳에서 복무할 수 있지만 군병원에서 근무하는 것이 아니면 전공을 살리기도, 전공 이전에 일반진료에 필요한 검사나 처치도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내가 복무한 곳은 전대급이었다. 군의관 수가 많은 만큼 많은 과가 편성되어 있고 원내 시설도 대대급에 비하면 방사선실이나 혈액검사실, 물리치료실 정도가 더 갖추어져 있지만 그뿐이다.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각 과의 전문 진단 장비가 갖추어져 있어 보다 사정이 좀 나은 편이지만 그 이외에는 엑스레이 정도뿐이라 진료의 깊이가 아주 얕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전문의 따고 군복무 하지만 각자 전문성을 발휘하기는 턱없이 부족한 환경이다. 병원급이 아니니만큼 군의관 진료도 과별이 아닌 내과/외과 섹션별로 한 타임에 2-3개의 외래를 여는 정도라 전문진료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일반 대대급처럼 일반진료를 보아야 했다. 나는 의사 면허 취득 후 5년 동안 한 번도 보지 않았던 내과 정형외과 안과 심지어 항정신성 약물을 다뤄본 이가 나밖에 없다는 이유로 정신과 환자까지 보았다. 진료영역이 넓어진 것은 나름 좋은 경험이었으나 기존 전문 진료영역이 얕아지다 못해 거의 소멸해 가는 것은 정말 좋지 않았다. 전문의 시험 치고 나서 가장 똑똑한 상태로 군 입대를 하지만 3년은 과거의 나를 잊지 않고 살아가기엔 참 긴 시간이다. 덕분에 녹슬어 버릴 대로 녹이 슬어버린 나는 제대 후 예정에도 없던 전임의를 하러 간다. 하지만 부대 내에 초음파 기기가 하나 놀고 있던 건 참 좋았다. 열심히 독학한 후에 통증주사도 몇 번 해 보았다. 다만 신경차단술 케이스가 없어서 좀 아쉬웠다. 1년차때부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더라면 몇 케이스 건질 수 있었을 것인데.
 
2-3. 적은 페이
솔직히 일은 편해서 좋지만 페이가 이전보다 적으니 재정적 자유도가 다소 떨어진다. 3년 복무 중 결혼 전에는 벌이보단 지출이 극도로 적어 그와중에도 저축이 가능했지만 결혼 준비 시점 이후부터는 그런 것도 없었다. 나는 영외근무자라 생활비 아낄 수단이 부족해서 씀씀이는 비슷했는데, 요즘 군간부 처우 문제가 자주 거론되는 것처럼 벌이 자체는 넉넉하지 않다. 그래도 3년간 일이 너무나도 편했기 때문에 이 정도 로딩에 돈 세 배 정도 주면 평생 말뚝 박을 수 있을지도?라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만큼 돈을 줄 리가 없다. 더더욱 전문의까지 따고 말뚝 박을 수는 없지. 이제 제대하고 돈 벌자...
 
2-4. COVID-19 pandemic
본디 군의관은 큰 일 하지 않고, 작고 소소하지만 귀찮은 일들을 두루 해 가면서, 3년 동안 큰 사고 없이 조용히 있다 가는 것이라고 배웠지만 코비드19 판데믹으로 모든 것이 깨졌다. 해외여행으로의 길은 차단, 초창기엔 부대 내 확진자 발생 여부에 전전긍긍, 덩달아 우리의 퇴근 후 생활도 온갖 규정을 근거로 규제를 당하니 당최 뭘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곳도 가지 말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라고 했던 시기는 꽤 힘든 나날이었다. 다들 들키지 않게 여기저기 다니고는 했지만 한 번이라도 동선일치자가 되어 검사를 받거나 격리를 해야 하는 날에는 굉장히 많은 눈치를 보아야 했다. 사실 문제삼으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부서장들은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주는 분위기였다. 군대는 융통성 없는 집단이지만 징계에 있어서는 융통성이 매우 크게 발휘된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소극적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도 사고 친 적이 한 번 있었고 그 이후로는 다소 의기소침해져서 정말 조심하곤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위축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알아서 눈치껏 잘 돌아다니면 되었던 것 같다. 이 판데믹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길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나는 지금 이 결혼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군의관 로딩도 늘었다. 백신이 생기기 전에는 선별진료소나 생활치료센터 심지어 중수본 등 군 안팎으로 차출당할 일이 많았고 백신이 들어온 후에는 어느 기관보다도 앞장 서서 접종을 했다. 판데믹 이후 뚫린 역학적 방어선을 처리하느라 선별진료소 업무도 맡았다. 사실 군대의 특성상 호흡기 증상이 조금만 있어도 선제적으로 PCR이나 RAT를 시행하니 일일이 결과 확인하고 약 처방하느라 일이 많았다. 더구나 부대 규모가 크다 보니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불어 어느 직장이나 기관에서건 비슷한 분위기였겠지만, 코비드19 판데믹 초창기에는 이 감염이란 것 자체를 엄청 금기시했던 때가 있었다. 확진되는 것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어딘가에서 동선이 겹치는 것조차 정말 큰 일이었다. 군대라는 곳이 늘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경향이 있기도 하고, 더구나 기본적으로 집단생활을 하기에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염성 질환과 관련해서는 공중보건 부분에 인원을 따로 편성해서 예방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렇기에 코비드 19에 대해서는 더욱더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부대 첫 배치 당시 열명 내외의 확진자 인적사항과 동선 등을 정리하여 하나하나 벽에 붙여 놓았던 것을 보고는 군대란 곳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집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5. 고요의 바다
시간이 많은 것은 확실한 장점이다. 하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나태하다. 내 시간이 많아지면 좀 더 자고 싶고, 손을 모아 좀 더 눕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면 삶의 가난이 도적같이 찾아올 것이다(잠언 24:33). 안락함에 젖으면 나태해지기 쉬우며 사람들은 스스로가 나태의 바다에 빠져 가라앉고 있는지를 자각하기 어렵다. 사실 군의관 3년동안 그 충분한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을 보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본디 쉼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라 이 긴 시간을 충분한 휴식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쉬다 보면 부지런했던 과거의 나를 잊기 쉬울 수 있다. 전역 앞둔 군의관들이 다들 하는 걱정 중 하나는 이제 사회 나가면 이렇게 못 누워 있을 텐데 하는 것이었다. 물론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우리네 일터가 긴박하고 바쁘면 우리는 다시 스스로를 워밍업 시켜 이전의 부지런한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지만 그게 과연 쉬울까? 그렇기에 시간이 많고 쉴 수 있다고 그렇게 좋은 시기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3. 그 외
 
3-1. 사람들
조종사. 공군, 특히 비행단은 비행으로 시작해서 비행으로 끝난다. 거의 모든 부서가 비행하는 사람과 전투기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조종사들을 대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분들은 존경해 마다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다. 참 어렵고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조종사들을 좀 더 특별대우 하지는 않았고 그냥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보았다. 하지만 현재의 의학적 상태나 복용하는 약 등이 비행의 적정성과 연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진료에 조금 더 신경써야 하는 부분은 존재했다. 코비드 판데믹 이전에는 조종사와 친해질 자리도 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안 좋은 시기와 맞물려 그럴 만한 기회가 잘 없었다. 하지만 그닥 아쉽지는 않다.
 
장교와 부사관. 그나마 접할 수 있는 상급자인 전대장은 대체로 우리에게 호의적이었으며, 다른 장교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신경 쓰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외 진료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장교들은 나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매우 젠틀했다. 처음에는 상사를 대하듯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적응을 한 후에는 마음 편하게 먹고 내가 과거에 보았던 환자들과 비슷하게 대했다. 확실히 내가 부담 가지지 않아야 환자를 잘 볼 수 있는 것 같다. 다른 부사관들은 처음엔 군의관의 적으로만 느껴졌다. 선배 군의관들이 내린 야마도 그러했다. 어떻게든 군의관에게 떠넘기거나 걸고넘어질 궁리만 하며 우리를 적대하듯 우리도 부사관들을 적대해야 우리의 로딩을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계급의 논리로 결국엔 군의관이 이기는 그림이 그려졌다. 첫 한 해는 그렇게 긴강잠이 끊이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다가 시간이 지나고 2년 차가 되며 그런 스탠스가 많이 누그러졌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바뀐 탓인지, 아니면 나와 우리의 인식이 바뀐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이 점점 지나며 그 사람들을 다시 보니 본인들도 어쩔 수 없이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하달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개 직장인일 뿐이었다. 월급도 그다지 많지 않을 터인데 간혹 휴일도 반납하고 출근해서 잔업을 하는 모습은 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지면 어떻게든 이래저래 짬때리려는 모습은 여전히 보인다. 이런 미묘한 조직사회는 참 어렵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은 그 자체로 참 값지다.
 
병사. 본디 공군이 복무기간이 쪼금 더 긴 대신 꿀을 달달하게 빠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3년동안 보아 온 공군 사병들은 안 좋은 쪽으로 규격 외의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느낌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잘 이용하여 꿀을 빨고자 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보였다. 별 시덥잖은 사유로 열외 소견서 떼려고도 하고, 코비드 19 판데믹 때 개인방역을 느슨히 하여 어떻게든 격리됨으로써 근무를 빠지려고도 해서 한때는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다들 머리 싸매고 고민한 적도 있다. 얼 빠진 채로 병영생활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때 휴가복귀병들을 단체로 숙소에 격리시켜놓고 관리하던 적이 있었다. 보통은 들어올 때 PCR이나 신속항원검사를 하지만 잠복기 등으로 추가적인 검사를 시행하고 나서 격리해제를 결정했다. 그래서 추가 검사를 하겠노라고 사전 공지를 한 후 찾아가면 거의 매번 몇몇 인원이 잠을 자고 있거나 샤워를 하고 있거나 해서 주임원사들이 한참 동안 준비를 더 시켜야 했다. 사병들의 태도 문제인지 부사관들이 전달체계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아픈 병사들이 참 많았다. 이런 정신질환이면 입대가 안 될 텐데?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복무가능인원이 점차 줄어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폐해였던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입대하면 안 되는 사람들은 입대를 시키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모두가 힘들다.
 
 

3년간 얌전하게,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이 시기가 지나가길 바랐고 그 바람대로 무사히 군복무를 마친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기는 또 없을 것이다. 툴툴거리긴 했지만 3년 동안 참 호사를 누렸다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일 하자...

Son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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