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는 시놉시스건 뭐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백허그하는 각키 표정이 재밌어 보여서 보기 시작했다. 근데 이렇게 정신 나간 소재와 정신 나간 연출일 줄이야. 이 드라마는 스윽 보면 패러디에 엄청 힘을 쏟는 가벼운 로맨스 코미디물인 것 같지만 그런 와중에도 구 시대와 새 시대가 맞물려 발생하는 많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꾸준히 언급한다. 그럼에도 무거운 주제를 전개하는 과정은 결코 무겁지 않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장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것에 비해 생각할 거리도, 다짐하고 나아가야 할 거리도 많았던 점에서 엄청 대단하진 않더라도 더욱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시리즈였다.
1. 가족의 형태, 그래도 추구해야 할 것은
최근 들어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전체를 더욱 중요히 여겨 개인의 희생이나 헌신이 당연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개인의 만족과 행복이 더욱 중요하다. 가족에 대한 헌신은 줄고 이해와 배려를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와 맞지 않으면 가족이라는 관계마저 끊고 그냥 각자의 길을 떠난다. 이혼에 대한 심리적 허들 또한 많이 붕괴되며 이혼률은 느리지만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반면 혼인률은 빠르게 감소한다. 헌신하고 말고를 떠나 갈등 자체를 조성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결혼을 포기하며 1인 가구로 남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런 개인주의의 근원에는 경기침체가 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경향과 더불어 혈연 혹은 법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결혼 제도 이외에서 가족 이상의 유대감으로 집단을 이룬 삶을 꾸리는 사람들도 있다.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을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큰 범주로써의 가족으로 보는 추세이다.
미쿠리와 히라마사의 경우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이어진 비전형적인 형태의 가족이다. 사랑 없는 사실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가족상의 제시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삶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이 커져 결국 법적인 혼인을 통한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로 전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처음에 제시했던 새로운 가족상이 점차 목소리를 잃으며 결국 '진정한 가족의 형태는 전통적인 모습 뿐이다'라고 오인하게끔 한다. 주장이 흐려지는 것인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새로운 가족의 형태 따위가 아니라 서로간의 존중과 이해, 화합이 희미해지는 이 시대에 전하고자 하는 바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삶의 형태가 어떻든 간에 이기주의가 무한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좀 더 이타적일 수는 없는 것일까?
1-1. 미쿠리와 히라마사
계약 관계에서 진정한 부부로 거듭나는 데 작용한 두 사람의 심리는 어떨까? 히라마사의 심리는 의외로 알기 쉽다. 보통 쑥맥으로 표현되는 초식남은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의 모든 여자를 연애 및 결혼 가능 범주에 둔다. 또한 그 연애와 결혼 가능성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확률 또한 상당히 높다. 인사만 몇 번 해도 벌써 손자 이름 생각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경험이 없는 남자에게는 여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정말 의미가 크다. 때문에 히라마사에게는 미쿠리라는 사람의 됨됨이 보다는 여자라는 존재만으로 미쿠리를 좋아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생긴다. 물론 거기서 더 나아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진정으로 사랑하고자 함은 미쿠리라는 사람 자체에 달려 있었지만.
반면 미쿠리의 심리가 참 궁금했다. 히라마사처럼 연애경험 없는 쑥맥도 아니다. 취업 문제에서 도망치고자 정말 사전 그대로의 취집이라는 방법을 택했지만 그 결혼에는 결코 사랑이 없었다. 포옹의 날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스킨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가짜 부부 관계를 의심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보조적 수단이었다. 사랑 없는 계약 부부였지만 어느새부턴가 미쿠리는 히라마사로부터의 관심과 인정을 갈구한다. 과연 미쿠리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히라마사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사실 남녀가 가까이 지내다 보면 없던 마음도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 같다. 실제 두 배우가 부부가 된 것처럼 드라마 촬영 중 주연배우들이 마음이 생겨 사랑을 키우게 되는 것 또한 같은 심리이다 싶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의 성품이 서로 진하게 공명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없던 것도 만들어서 하던 포옹이 단순히 보여주기가 아닌 현실에 치여 상처받은 사람끼리 주고받는 위로의 의미로 거듭나게 되었을 것이다.
2. 가사노동의 가치
나도 결혼을 하고 느끼지만 가사노동은 결코 쉽지 않다. 하루이틀 사이에는 별로 티가 나지 않지만 짧게 한주 정도만 손을 놓아도 집은 엉망이 된다. 집은 휴식과 충전의 장이기에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터전이며 그만큼 이를 유지하고 가꾸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손이 많이 간다. 정말로 많이 간다. 이건 겪어보지 않으면 정말로 모른다. 다만 우리 가정은 이런 문제에서 명쾌해졌다. 벌이도 근무시간도 차이 나긴 하지만 일단 둘 다 직업이 있으니 가사도 함께 부담한다. 가사부담의 비중은 차이가 있긴 해도 늘 유동적이고 보통 때에 따라 여유가 되는 쪽이 더욱 많이 담당하거나 각자 잘 하는 부분을 서로 나누어 처리한다. 이런 점에 있어 우리 가정이 평화로운 것은 정말 다행이다. 극중 진정한 가족의 형태를 지니게 된 후의 츠자키 부부와 정말 비슷한 것 같다. 처음에는 노동의 비중이나 가사의 완성도 부분에서 많은 마찰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지고 적당한 건 서로 타협하고 도우며 간극을 좁혀 나가는 모습이 딱 우리 부부 같았다.
남녀를 막론하고 전업주부는 가사에 있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전업주부라고 그 모든 일을 무급으로 후려침 당해야 하는가 하는 미쿠리의 물음은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하다. 앞서 말했듯 집안일은 힘들고 어렵다. 누군가는 그것을 모두 감당하지 못해 재화를 지불하여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만큼 가사에 투입되는 노동력의 가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전업주부에게도 적절한 노동강도와 휴식 그리고 보상이 필요하다. 가정마다 상황이 달라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의 중요함은 꾸준히 고려되어야 한다. 더불어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중이 늘고 있으니 가사노동이 여성에게만 편중되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벗어나 이 모든 것을 함께 꾸려나가야 한다는 인식의 개선 그리고 그것들을 보조해 줄 수 있는 제도의 개선(칼퇴🙏 등...)도 필요하다.
3. 임신과 출산의 어려움
우리는 부부라면 자녀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아주 전통적인 마인드의 부부이고 출산과 육아 모두를 감내할 경제적 여력도 있다. 덕분에 앞으로가 낙관스러움은 참 다행스럽다. 남편으로써 출산을 담당할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와이프는 그나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라 이 모든 것을 당연히 감내하겠다 한다. 하지만 다가올 어려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고 실제로 임신 중 겪게 되는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숭고라는 단어로는 전혀 위로도 보상도 되지 않는다. 또한 아내가 몸이 점차 무거워지면서 내가 부담해야 할 가사의 비중 또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임신은 부인과 남편 모두에게 큰 일이다. 누구나가 부모가 되는 것은 처음이기에 출산과 육아에도 서투를 수밖에 없다. 출산을 앞두며 츠자키 부부가 겪었던 고충은 근미래 우리 부부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 모두가 다 감내할 필요가 있다. 자녀을 낳고 양육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가정은 어떨까? 결혼 이전에 홀로서기조차 빠뜻한 현대사회에서는 출산은 먼 나라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슈카월드에서도(#) 주기적으로(#) 목놓아(#) 울부짖고(#) 있는(#) 출산율 문제는 생각보다 꽤 오래되었으며 여러가지 원인이 얽혀 있다 보니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실질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정부 부처의 문제도 크지만 사회적 인식 개선을 통해 기업이나 집단, 개인이 출산과 육아에 도움이 되도록 배려함 또한 필요한데 이것이 아직까지 충분하지 못한 원인도 크다. 오히려 그 와중에 출산율 해결을 역행(#)하는 사회 분위기 또한 벌어진다. 당장의 물적, 인적 자원이 직간접적으로 요구되기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큰 숙제를 열심히 노력해서 풀어도 모자란 판국에 참 안타깝다. 어쩌면 대한민국 출산율 문제는 지구온난화처럼 이미 임계점을 넘어버린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4. 트리비아
사회적 문제 이야기만 했는데 진짜 작품 이야기를 짤막하게 해 보자면... 제목처럼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문제들은 가끔은 스스로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벅차다. 무서운 마음에 그곳에서 잠시 도망치는 것은 물론 부끄러운 행동이지만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고갈된 몸과 마음의 체력을 보충하고 그 다음을 도모할 시간을 버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된다. 오버스펙과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취업으로부터 도망친 미쿠리, 낮은 자존감 때문에 미쿠리로부터 도망친 히라마사 두 사람에게 도망은 서투름을 무릅쓰고 다음을 준비하기에 꼭 필요한 행동이었다. 다만 도망 자체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두 사람도 결국 스스로 혹은 서로에게 주어진 문제들에 대해 그 문제들과 직접 마주함으로써 해결해 나간다. 결국 우리가 그 도망침에서 얻어야 할 것은 문제를 마주할 용기이다.
여기 나오는 배우는 아라가키 유이, 후루타 아라타(한자와 나오키 S2에서 먼저 봤는데... 이 작품과 갭이 너무 커서 충격이었다ㅋㅋ) 정도? 호시노 겐은 이 작품으로 처음 봤는데 연기와 더불어 본업인 뮤지션으로 어마어마하게 인기가 많다는 것도 놀랐고, 좋은 노래도 엄청 많았는데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도 놀랐고, SP 촬영 이후 실제로 아라가키 유이와 결혼하게 된 것도 놀랐다. 처음엔 결혼한 것도 모르고 보다가 한 6화 접어들어서 뒤늦게 알게 되어가지고 더욱 몰입해서 봤다. 어쨌든 나는 호시노 겐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내가 남자를 덕질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동안 호시노 겐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한목소리로 말하는 점은 그 이쁜 아라가키 유이보다도 유리 역의 이시다 유리코가 더욱 이쁘다는 것이다.
본편은 미쿠리의 상상이 온갖 패러디로 점철된 작품이니만큼 일본 미디어 문화를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이 드라마를 더욱 잘 즐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그만큼 일본 문화에 빠삭한 경우는 잘 없지 않을까? 심지어 나는 국내 TV 프로그램도 잘 안 본다. 패러디가 나올 때마다 '이건 패러디 장면이군'하면서 눈치채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래도 재밌게 보았다. 더불어 예전에 감상을 남긴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처럼 COVID-19 판데믹이라는 요소를 적극 활용한 SP는 참 흥미롭다. 특히 흑사병이라도 발병한 것 같은 공포스럽고 혼란한 분위기, 실내에서 마스크 꽁꽁 둘러싸고 있는 삭막한 분위기, 접촉도 뭐도 조심스러웠던 판데믹 초창기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묘사가 피부에 와닿는다. 2020년 당시 안그래도 삭막한 군복무를 더욱 삭막하게 했던 그때의 감정도 떠오르고, 결국 3년간 잘 극복해 낸 모두가 참 대견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다만 이 판데믹 배경은 애틋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데는 일조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깨는 것 같다 아쉽다. SP는 출산과 육아의 어려움에 집중했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애초에 제작 의도가 힘든 판데믹을 겪는 모든 이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주기 위함인 것 같아 그냥 눈감아 주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