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부터 왕성한 활동을 해 오던 베르베르였고, <뇌>를 시작으로 2000년대 후반까지는 그의 작품이 나오는 족족 구해다 읽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신> 정주행을 2번이나 실패할 때 즈음부터는 학업에 바쁘다 보니 한동안 책을 읽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의 신간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때는 책이 그다지 고프지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조금 지나 책 읽는 취미를 다시 가지게 된 이후로 작년 중순 서점에 들를 일이 있었다. <기억>이 출간되어 가판대에 크게 전시되어 있는 걸 보고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선뜻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때는 소설이 그다지 고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치 친했던 옛 친구같은 베르베르와는 멀어지는 듯 했으나 최근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겨서 냅다 택했다. 물론 진중문고를 통해서.
1-1. <심판>은 베르베르의 두번째 희곡이다. 무려 희곡! 희곡이란 문학의 형태는 고등학교시절 수능 지문으로 접한 이후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사실 나에게 희곡이란 매우 친숙한 장르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연극을 자주 보러 다녀서란 이유는 아니다. 내가 본 연극은 딱 한 번, <삼백에 오십> 뿐이다. 친숙한 이유인즉슨 초딩 시절 놀던 게임 커뮤니티(#)에는 소설 게시판이 있었는데, 당시 게임을 소재로 한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으나 보통 소설이 가지고 있는 형태를 잘 몰랐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은 이 희곡 형태로 소설을 썼다. 난 이런 형태의 소설(이라는 이름을 표방한 정체 불명의 작문)이 그 시절 그 나이대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최근 침착맨 방송에서 딸 쏘영이가 쓴 소설이라며 보여준 것(#)이 그때 우리가 쓰던 소설의 형태와 정말 많이 닮아 있었다.
책과는 상관 없는 내용을 계속 주저리주저리 읊고 있지만, 어쨌든 책을 읽는 내내 그 시절 생각이 많이 났다. 다만 그 당시에 그런 이상한 소설을 쓰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이후 블로그 등지에서 자잘한 글을 삐뚤빼뚤하게 쓰던 시절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글을 쓰던 습관이 계속 이어졌다. 20년도 더 전에 생각하고 타이핑을 하던 기억은 아직도 글을 읽기 좋아하고, 쓰기 좋아하는 습성으로 남은 것 같아 나름 좋은 자산이 된 것 같다.
2-1. 주인공인 아나톨 파숑의 죽음은 나름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니라고 느껴지는데, 그는 이미 폐암으로 3년간이나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암이란 것은 죽음이 점점 다가옴을 느끼며 죽음의 순간을 미리 준비했을 수도 있겠지만 삶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수술대에 올랐던 것이고 table death는 현실의 많은 경우에서도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더불어 이미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신체 일부 기능에 마비가 온 몸에라도 돌아가려고 했던 그의 모습은 지금의 이 죽음이 예정되지도, 준비되지도 않은 죽음임을 강하게 반증한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애초에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는 죽음은 매우 슬플 것 같다. 요 몇 년 사이 갑작스레 떠났던 내 주위의 몇 분이 생각난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빈소를 찾지만 영정사진을 보아도 누군가가 떠나갔다는 사실은 매번 잘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상실감은 꼭 얼마간의 텀을 두고 찾아온다. 아무쪼록 먼저 가신 분들에게는 안식과, 남겨진 자들에게는 위로가 있었으면 좋겠다.
2-2. 여기에 또다른 죽음이 있다. <엔딩 노트>는 아버지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관찰하는 딸의 눈으로 촬영되었지만, 하지만 그 딸의 입으로 마치 아버지 본인이 되어 말을 하듯 진술해 나가는 독특하지만 매우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두가지 감정은 '이렇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축복받은 일이구나'라는 것과, '이만큼 동요함 없이 담담하게 준비를 했던 죽음이라도 떠나는 순간은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구나'이다. <심판>에서는 환생 전 재판의 과정에서 다음 생애에서 맞을 죽음의 방식마저 선택하는 아주 특이한 장면이 등장한다. 이와 달리 현실에서의 우리는 자살을 제외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택할 수는 없다(사실 자살에까지 이르는 과정도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선택이 가능하다면 준비할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3. 그 이전에 <심판>에서 사용된 주된 소재는 전생과 환생이다. 이는 베르베르의 작품에서 줄기차게 사용되어 온 요소이다. 나는 이 소재를 볼 때마다 내 인생에는 환생은 없었으면 한다. 억울할 삶을 되돌리지 못해 억울함을 풀 수 없는 것 또한 억울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삶은 한 번 뿐인 것이 더욱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지금 이 삶과 이 순간에 보다 더 열심을 품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생은 망했어'라면서 자포자기 후 다음 생을 기약하는 삶은 마치 LOL에서 1분 30초 전 부주의하게 퍼블을 따여놓고 '15ㄱㄱ'를 외치는 게이머 같다. 심해에서도, 천상계의 천상계가 모인 프로 경기에서도 끊임없이 묘수를 찾고자 노력하고 도전하면 결국엔 역전하는 경기가 나오거늘.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그렇게 쉽게 역전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 데에 좀 더 주안점을 두고 싶다. 그래서 난 환생하기 싫다.
4. 더불어 심판의 순간에 나는 과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이 책을 계기로 또 한번 되돌아봅니다.